무속신앙

한국의 '추모 정치'와 무속에서의 해원(解寃)

주머니괴물 2026. 1. 15. 00:13

한국 사회는 왜 대형 참사 앞에서 원인 규명보다 위로에 집착할까요? 망자에게 부여된 절대적 권위와 이를 이용하는 추모의 정치를 무속의 굿과 해원(解寃)의 원리로 분석합니다. 슬픔이 어떻게 이성을 마비시키고 비극을 반복시키는지, 인류학적 시선으로 파헤칩니다.

 

해원 굿 추모

 

 

한국 사회에서는 망자의 권위가 높습니다. 생전에 어떤 삶을 살았던지, 어떤 맥락에서 사고가 발생했던지, 일단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망자는 절대적인 도덕적 우위와 권위를 갖게 됩니다.

 

망자를 앞에 두고 이성적인 질문을 던지는 행위 자체가 도덕적으로 문제 있는 행동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망자에게 묻지 못합니다.

 

오늘은 무속적 세계관을 통해, 한국 사회가 망자를 소비하는 방식과 그로 인해 반복되는 비극의 매커니즘을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망자의 절대적인 권위

합동 분향소와 영정의 정치학

대형 사고나 사회적 비극이 발생하면 원인 분석과 책임 규명보다 가장 먼저 추모의 언어와 분위기가 사회를 지배합니다. 현수막이 걸리고 합동 분향소가 설치되는데, 이러한 합동 분향소는 해외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사례입니다. 또한 언론에서는 피해자의 얼굴과 이름을 반복적으로 내보냅니다. 이건 얼핏 공동체적 애도의 과정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추모는 정지된 상태로 고착됩니다. 이 때문에 사건은 끝나지 않고 망자는 현재에 자꾸 소환됩니다.

 

한국 사회에서 추모의 정치가 반복되는 것은 제도적 질문을 막는 장치가 됩니다. 왜 이런 구조가 방치되었느냐는 질문보다 누가 더 진정성있게 슬퍼하는지가 중요해지는 것입니다. 판단 기준에서 사실과 책임보다 태도와 감정이 중요시 되는 바탕입니다.

 

이것이 바로 망자에게 부여되는 권위입니다. 이 권위는 선출되지고 않고, 검증되지도 않습니다. 단지 비극적으로 사망했다는 것만으로 정당화되는 것입니다.

 

도덕적 방패가 된 죽음

 

무속적 세계관에서 망자는 한을 품은 존재로서, 살아 있는 이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도 비슷하게 작동합니다. 망자의 고통과 권위가 현재의 판단을 결정하는 힘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상징이 된 이름들

비극적인 사건의 피해자의 이름이 법안의 제목이 되고, 공공 시설의 명칭이 되며, 기념일로 제정되는 예시들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망자는 하나의 상징으로 자리 잡습니다. 개인의 삶 보다 하나의 의미로서 남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해당 행위를 반대하는 것은 망자를 부정하는 것으로 오해받기 쉽습니다. 이 때문에 토론이 위축되고, 해당 정책의 효과나 부작용을 말하는 행위가 망자에 대한 공감 부족, 망자를 존중하지 않는 태도로 해석됩니다.

 

토론의 실종

이처럼 망자는 기억 속에서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계속해서 재편집되고, 현재의 권력 관계에 영향을 미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망자가 스스로 권력을 갖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권력은 망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을 위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망자를 매개로 한 권위는 도덕적 방패를 두르게 됩니다.

 

사회는 아픔을 다루는 데 익숙해지지만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은 점점 약해지게 된다. 위로에 집중하는 정치의 단점이다. 제도가 작동하기 보다는 상징만 늘어나는 것이다.

 

추모 정치는 거대한 굿판

이러한 현상을 문화인류학적 관점에서 보면, 한국의 추모 정치는 거대한 굿판과 놀랍도록 비슷합니다.

 

 

굿을 통한 해원

무속에서 굿은 해원의 기능을 합니다. 해원은 원과 한을 푸는 것, 즉 감정을 안정시키는 것입니다. 잘잘못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억울함을 푸는 것이 중요합니다.

 

굿에서 망자는 달래서 보내야 할 존재입니다. 망자를 만족시키면 현재의 불안이 가라앉는데, 현대 사회의 추모 정치도 이와 유사합니다. 망자를 제대로 보내지 못할수록 사회의 불안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망자를 기억하는 방식입니다. 망자는 존중받아야 마땅하지만, 망자가 사회를 대신 판단하게 되면 사회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게 됩니다.

 

위로라는 이름의 사회적 기술

 

문제는 굿이 끝난 뒤입니다. 굿은 마음을 위로할 뿐, 무너진 다리를 고치거나 구멍난 시스템을 메우지는 못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위로 정치도 이와 비슷합니다. 충분한 위로가 제공되고 나면 문제 해결이 아니라 망각의 단계로 넘어 갑니다. 대형 사고가 발생한 뒤 제도적 보완과 책임 문제로 한참동안 시끄럽지만, 몇 년 뒤 비슷한 사고가 또 다시 반복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문제를 견디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해결은 시간이 필요하고 갈등을 요구하며 불편하고 어려운 과정이지만, 위로는 즉각적이고 감정적으로 명확해서 비교적 쉽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국 사회에서 위로는 하나의 사회적 기술이 되었습니다. 문제점을 따지기 보다는 얼마나 아팠는지를 먼저 확인하는 상황이 거듭되면서 문제를 분석하는 기술이 점점 퇴화되는 것입니다.

 

대형 사고나 구조적 실패가 발생했을 때 사회적으로 반복되는 프로세스는 거의 의례에 가까워졌습니다. 매번 책임자 처벌과 제도적 보완을 외치지만, 곧 애도와 추모 속으로 사라집니다.

 

추모식, 기념, 공간, 상징, 조형물 등은 불안을 잠시 가라앉히는 효과를 가집니다.

굿도 이와 같은 효과를 지닙니다. 굿은 문제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아프지 않게 만드는 위로의 장치일 뿐입니다. 


 

결국 우리는 아픔을 다루는 데는 익숙해졌지만,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은 퇴화해버렸습니다.

매번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외치지만, 몇 년 뒤 비슷한 사고가 판박이처럼 반복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제도는 작동하지 않고, 광화문 거리에 추모의 상징물만 늘어가는 현실입니다.

 

무속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은 망자는 달래서 저승으로 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망자가 이승에 남아 산 사람을 좌지우지하게 두면 집안이 망한다고 봅니다.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망자는 존중받아야 마땅하지만, 망자가 사회의 판단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슬픔이 이성을 덮을 때, 사회는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습니다.

 

진정한 추모는 망자의 이름을 딴 법을 급조하는 것이 아니라, 차가운 이성으로 시스템의 구멍을 찾아내어 다시는 같은 죽음이 반복되지 않도록 만드는 일일 것입니다. 이제는 거대한 굿판을 걷어치우고, 망자를 기억의 영역으로, 산 자는 해결의 영역으로 분리해야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