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갈 때 왜 '손 없는 날'을 따질까요? 현대식 아파트에도 우리 집을 지키는 신들이 살고 있습니다. 거실의 성주신부터 부엌의 조왕신까지, 사라져가는 '가신(家神) 신앙'의 따뜻한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이사할 때 [손 없는 날]을 따지는 이유
새 아파트로 이사를 준비할 때, [손 없는 날]을 확인해 본 경험, 다들 있으실 겁니다.
여기서 [손]이란 날짜에 따라 동서남북으로 다니면서 사람의 활동을 방해한다는 귀신(손님)을 뜻합니다.
첨단 스마트홈 시대에도 우리는 여전히 알게 모르게 신의 눈치를 보고 있는 셈이죠.
제가 자주 예시로 드는 오컬트 드라마 [손 the guest]의 제목에 있는 [손]도 바로 그 [손]입니다.
극중에서 주인공인 '화평'이 허구헌날
"손이 왔어, 굿 해야 돼"하고 이야기 하죠.

이사 해 보신 분들은 아실겁니다. 이삿집센터를 예약할 때 손 없는 날은 프리미엄이 붙어서 가격이 더 비싸죠!
그래서 손 없는 날을 미신으로 여기고 믿지 않는 분이라면 오히려 이날을 피해 저렴한 가격으로 이사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큰 달력에는 농사에 필요한 절기와 함께 손 없는 날이 표시되어 있기도 합니다.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집이 단순히 벽돌과 콘크리트로 지어진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여러 신령이 함께 거주하는 신성한 공간이라고 믿었습니다. 이를 '신(家神) 신앙'이라고 합니다.
비록 지금은 아파트로 주거 환경이 바뀌면서 그 모습이 많이 희미해졌지만, 우리 집 구석구석에는 여전히 가족의 안녕을 지켜주는 신들이 숨 쉬고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 집의 보이지 않는 룸메이트들을 소개합니다.
우리 집의 최고 어른, 성주신 (거실)
가장 먼저 소개할 신은 집안의 최고 어른인 [성주신]입니다.
역할: 가장의 성공과 집안의 대박
성주신은 한 집안의 가장(家長)을 보호하고, 그 집의 전체적인 재물운과 성공을 관장하는 가장 중요한 신입니다.
옛날에는 집을 지탱하는 가장 큰 기둥인 대들보(상량)에 머문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집을 새로 짓거나 이사하면 가장 먼저 성주굿을 하거나 성주 받아 모시는 의례를 행했죠.
아파트의 성주신은 어디에?
그렇다면 대들보가 없는 현대식 아파트에서 성주신은 어디에 계실까요?
민속학자들은 집의 중심이 되는 공간, 즉 온 가족이 모이는 거실의 가장 큰 벽면이나 천장 부근에 머문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새집에 이사 갔을 때 현관문 위에 북어와 실타래를 걸어두는 풍습도 바로 이 성주신에게 "우리 집 잘 부탁합니다"라고 인사하는 작은 의례의 흔적입니다.

따뜻한 부엌의 수호자, 조왕신 (주방)
다음은 주부들의 가장 든든한 아군, 부엌을 지키는 [조왕신]입니다.
역할: 불과 음식, 가족의 건강
조왕신은 불(火)을 다루는 아궁이와 음식을 만드는 부뚜막에 거주합니다.
불은 곧 생명이자 에너지였기에, 조왕신은 가족의 건강, 특히 아이들의 안위를 책임지는 따뜻한 신입니다.
정화수 한 그릇
제가 요즘 재밌게 읽는 웹소설 [회사원이 퇴마를 잘함]의 한 에피소드에서도 조왕신에 대해 살짝 나왔는데요.
이사한 뒤 자꾸 가위가 눌린다는 제보자에게
집에 조왕신이 계시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래도 정 신경이 쓰이면 접시에 물을 담아 싱크대에 올려 놓으라는 조언을 합니다.
부엌에 있는 조왕신에게 물을 올리면 기도를 듣고 지켜준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드라마 [더킹 영원의 군주]에서도 장독대에서 정화수를 떠 놓고 기도하는 장면이 잠깐 나옵니다.

그것이 바로 조왕신에게 바치는 '정화수(조왕물)'입니다.
과거에 우리 할머니들은 매일 새벽 가장 먼저 맑은 물을 떠놓고 가족의 건강을 빌었습니다.
오늘날 아파트에서 아궁이는 사라졌지만, 조왕신은 여전히 불을 쓰는 가스레인지나 인덕션, 그리고 물을 쓰는 싱크대 주변에 머물며 우리가 먹는 음식을 지켜보고 계실 겁니다.
생명을 점지하는 할머니, 삼신 (안방)
아이를 가진 부모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이름, [삼신할머니]입니다.
역할: 출산과 육아의 신
삼신은 아이를 점지해주고, 출산을 돕고,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도록 돌봐주는 신입니다.
주로 집안에서 가장 따뜻하고 중요한 공간인 안방(주로 아랫목)에 모셨습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엉덩이에 있는 푸른 몽고반점을 보며 "삼신할머니가 빨리 나가라고 엉덩이를 때려서 생긴 자국"이라고 농담하던 것도 이 신앙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현대 의학의 힘으로 아이를 낳는 시대지만, 여전히 많은 부모가 아이의 탄생 앞에서 삼신할머니께 감사의 마음을 갖곤 합니다.
아이를 위한 작은 정성, 삼신상
요즘도 아이의 백일이나 돌이 되면 삼신상(三神床)을 차리는 가정이 꽤 있습니다.
보통 흰 쌀밥 세 그릇, 미역국 세 그릇, 그리고 정화수 세 그릇을 작은 상에 올려 안방 아랫목(또는 아이가 자는 방향)에 둡니다. 지역에 따라 여기에 삼색 나물을 함께 차리는 곳도 있습니다.

상을 차린 후에는 아이를 상 앞에 눕히고 "우리 아이 건강하게 잘 자라게 해주세요"라고 절을 올리거나 기도를 합니다. 잠시 자리를 비켜드려 삼신할머니가 식사하고 아이를 돌볼 시간을 드린 후, 상에 올린 음식은 가족들이 그날 다 먹어야 복이 온다고 합니다.
현대 의학의 힘으로 아이를 낳고 키우는 시대지만, 아이의 건강을 바라는 부모의 간절한 마음만큼은 예나 지금이나 삼신상 앞에 모이는 것 같습니다.
화장실의 괴팍한 신, 측신 (화장실)
마지막으로 가장 성격이 고약하고 무서운 신, 화장실을 지키는 [측신(측간신)]입니다.
역할: 공포의 대상
옛날 재래식 화장실은 집 본채와 멀리 떨어져 있고, 어둡고 냄새나는 음습한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곳을 지키는 측신은 신경질적이고 심술궂은 여신으로 묘사됩니다.
"밤에 화장실 갈 때 기침을 세 번 해라(인기척을 내라)",
"화장실에 신발을 빠뜨리면 재수가 없다" 같은 옛날 금기들은 모두 성격 까칠한 측신을 놀라게 하지 않기 위한 행동 지침이었습니다. 옛날 학교 괴담에 나오는 '빨간 휴지 줄까, 파란 휴지 줄까' 귀신의 원조격이기도 합니다.
아파트의 측신
다행히 현대의 아파트 화장실은 집 안으로 들어왔고, 밝고 깨끗해졌습니다.
민속학적으로 보면 측신의 힘이 예전만큼 강력하거나 무섭지는 않게 된 셈이죠.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예의
현대식 고층 아파트에서 가신을 모시기 위해 고사를 지내거나 매일 정화수를 뜨는 집은 거의 없습니다. 생활 방식이 바뀌면서 가신들은 서서히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잊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신 신앙의 본질은 미신이 아니라, 나의 가족이 머무는 이 공간이 안전하고 평안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입니다.
오늘 저녁, 퇴근하고 돌아와 따뜻한 거실 소파에 앉을 때, 맛있는 저녁을 준비하는 주방에 설 때, 한 번쯤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이 공간을 지켜주던 존재들에게 건네는 작은 감사의 마음을요. 그것이 사라져 가는 우리 전통에 대한 작은 예의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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